미국 의료기 창업, 왜 실패했을까? 메디케어와 보험 청구의 현실 [OUR K STORY #18]
OUR K STORY #18
한국에서 하던 방식으로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2005년, 미국 캘리포니아 가든그로브(Garden Grove)에 '종로 메디칼 서플라이(Jongro Medical Supply)'의 문을 열었습니다.
세무사를 통해 연방 국세청(IRS)에서 사업자 세금번호(EIN)를 발급받고, 카운티에 상호(DBA, Doing Business As)를 등록했습니다. 당시 캘리포니아에서는 가상의 상호를 사용할 경우 일정 기간 지역 신문에 공고를 게재해야 했기 때문에 신문 광고도 진행했습니다.
사업 준비부터 하나하나 새롭게 배워야 했습니다.
(미국에서 의료기 회사를 어떻게 시작했는지는 나중에 별도의 정보 글에서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모든 행정 절차를 마친 뒤, 드디어 간판을 달고 정식으로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의 경험이 있었기에 미국에서도 금방 자리를 잡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손님이 매장에 들어와 필요한 의료기를 고르고 결제하면 거래가 끝납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달랐습니다.
매장을 찾는 대부분의 고객은 현금이나 카드를 들고 오는 것이 아니라 병원 처방전(Prescription)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처방전을 확인한 뒤 휠체어, 워커, 혈당측정기, 당뇨신발 같은 의료기기를 먼저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돈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료기 비용은 고객에게 직접 받는 것이 아니라, 가입한 보험에 따라 메디케어(Medicare), 메디캘(Medi-Cal) 또는 민간 건강보험(Private Insurance)에 청구하는 구조였습니다.
미국 의료기 사업은 물건을 판매하는 사업이 아니라, 보험 청구 시스템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운영할 수 있는 사업이었습니다.
메디케어와 보험 청구가 사업의 핵심이었습니다
처방전을 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돈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보험금을 청구하려면 환자의 진단명(ICD Code), 의료기 품목(HCPCS Code), 의사의 처방 내용과 각종 증빙 서류를 정확하게 맞춰 제출해야 했습니다.
코드 하나만 잘못 입력되어도 청구가 반려(Rejection)되거나 다시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미국 의료기 업계에서는 이런 업무를 DME Billing & Coding이라고 부릅니다.
이 업무는 전문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문제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직원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설령 경험 있는 직원을 채용하려고 해도 인건비가 상당히 높았습니다.
막 창업한 작은 업체가 감당하기에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매장에서 고객을 응대하는 일반 직원 한 명을 채용하고, 메디케어 보험 청구와 의료기 코딩 업무는 프리랜서 코딩 전문가에게 맡기기로 했습니다.
청구할 서류가 생길 때마다 전문 코더에게 보내고, 작업한 시간만큼 비용을 지급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청구가 늦어질수록 대금 지급도 함께 늦어졌고, 결국 회사의 현금 흐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물건은 오늘 나갔지만 돈은 몇 달 뒤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어려웠던 고객 문제
또 다른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미국 생활에 익숙한 일부 한인 어르신들은 메디케어 혜택으로 의료기를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메디케어는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의료기 비용을 지원하지만, 모든 의료기가 무조건 무료인 것은 아니며 본인 부담금(Co-insurance)이나 규정이 적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규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여러 개의 의료기를 요구하거나, 가족들 몫까지 함께 받아가려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현금으로 의료기를 구매하는 고객은 매우 드물었습니다.
매일같이 처방전을 확인하고, 보험 서류를 준비하고, 청구 결과를 기다리는 일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후발주자가 살아남기에는 너무 높은 벽
이미 가든그로브와 오렌지카운티에는 오랫동안 메디케어와 병원 네트워크를 구축한 기존 의료기 업체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후발주자인 우리가 경쟁하기에는 시장의 진입장벽이 예상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좋은 제품과 성실함만 있으면 사업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달랐습니다.
좋은 제품보다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은 메디케어 제도, 보험 청구 시스템, 의료기 코딩, 그리고 현금 흐름 관리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해외 창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이 아니라 그 나라의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창업 노트 #18
상거래 문화의 차이를 사전에 철저히 파악하라
한국식 직접 판매 방식만 생각하고 진입했다가, 미국의 보험사 및 정부 청구 구조를 마주하며 초기 자금 회전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국가마다 다른 정산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이 창업의 첫걸음 입니다.
지연 정산 구조에서는 강력한 초기 자금 여력이 필수다
의료기는 먼저 공급되지만 대금은 나중에 정산됩니다. 매출이 발생해도 현금이 제때 들어오지 않으면 자금 압박이 커질 수 있습니다. 결국 현금 흐름(Cash Flow) 관리가 사업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고객층의 특성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라
타겟 고객층이 정부 혜택에 의존하는 경향이 높은 시장이라면, 정상적인 마진 구조를 확보하기가 훨씬 까다롭다는 점을 미리 계산했어야 했습니다.
다음 이야기
미국 의료기 사업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복잡한 제도와 언어의 벽은 시간이 갈수록 더 크게 다가왔고, 예상하지 못했던 규정 변화는 저희 사업에 큰 어려움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진짜 위기는 이제부터였습니다. 메디케어 청구 기준과 의료기 코딩 규정이 갑자기 바뀌면서 이미 판매한 의료기 대금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저는 사업을 살리기 위해 영어로 된 전문 교재를 붙들고 당뇨신발(Diabetic Shoes) 자격 취득에 도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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