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서 온 편지 한 장이 1년의 대금을 묶었습니다 [OUR K STORY #19]
OUR K STORY #19
미국 의료기 사업은 제품보다 서류가 더 중요했습니다
미국 의료기 사업(DME)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바로 '서류'와 '사람'이었습니다.
서류 청구가 조금씩 늦어지며 현금 흐름에 경고등이 켜지던 즈음, 결국 터질 게 터지고 말았습니다.
나라(메디케어/정부 기관)에서 매장으로 중요한 공식 우편물이 하나 날아왔습니다.
보험 청구를 계속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와 자격을 일정 기간 안에 갱신해야 한다는 안내였습니다.
당시 매장에는 일을 도와주던 직원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런 중요한 편지가 오면 업주에게 보고하고 처리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직원은 그 편지의 중요성을 몰랐는지 남편에게 그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영어가 서툴렀던 남편은 나라에서 온 편지들의 구체적인 행정 요구사항을 혼자서 다 파악하기 어려웠고, 나는 나대로 한국 사업과 미국을 수시로 오가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에 매장에 어떤 우편물이 오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편지는 저희에게 제때 전달되지 않았고
결국 누구도 그 편지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정부가 정한 마감 기한을 넘기고 말았습니다.
물건은 나갔는데 돈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기한을 놓친 뒤부터 보험 청구를 정상적으로 진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물건에 대한 코딩과 청구는 당연히 막혀버렸고,
더 무서운 것은 그동안 이미 청구해서 대기 중이던 모든 코딩 대금까지 한꺼번에 묶여버렸습니다.
물건은 이미 손님들에게 다 나갔는데, 나라에서는 단 한 푼의 돈도 들어오지 않는 기가 막힌 상황이 시작되었습니다.
휠체어와 워커, 혈당측정기 같은 의료기는 계속 나갔습니다.
환자들은 필요한 의료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공급을 멈출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보험금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 꼬여버린 시스템을 풀고 자격을 정상화하는 데 무려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1년 동안 우리는 돈도 받지 못한 채 당장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물건만 계속 내어주어야 했습니다.
1년 뒤 가까스로 서류가 풀려 밀린 대금을 다시 청구했지만, 안타깝게도 전액을 다 돌려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또 하나의 벽 당뇨신발 자격증 시험
처음에 당뇨신발을 그냥 팔았었는데 당뇨신발은 메디케어로 맞춤 당뇨신발(Diabetic Shoes)과 인솔을 청구해 판매하려면, 매장에 전문 자격(Fitter License)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등록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에게만 맡겨둘 수 없어 내가 직접 자격증을 따기로 결심했습니다.
영문 교재를 받아 들었을 때는 막막했습니다.
발의 구조와 당뇨병성 족부질환, 신발 피팅 방법, 메디케어 규정까지 모든 내용이 영어였습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사전을 찾아가며 공부했습니다.
다행히 기출문제가 있어서 문제와 답 위주로 암기하며 책을 보며 공부했습니다.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라,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시험 당일, 미국 테스팅 센터에 찾아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험을 기다리며 로비에서 한자라도 더 공부하기 위해 문제집을 보고 있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한 자라도 더 외워보려 했지만, 막상 시험을 보려니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시간이 되어 신분 확인을 마치고 시험실에 들어가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보안이 철저한 시험실 안,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소음을 차단하는 헤드폰을 끼고 모니터 속 문제들을 하나하나 풀어 내려갔습니다.
낯선 환경과 언어의 장벽 속에서 마우스를 쥐고 답을 클릭해 나갈 때의 피 말리는 긴장감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다행히 시험에 합격했고, 당뇨 치료용 신발을 취급하는 데 필요한 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습니다.
합격했다는 기쁨보다 '이제 조금은 직접 해낼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더 컸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좋은 물건을 들여와 손님에게 팔고 돈을 받으면 그만이었던 사업이, 미국에서는 서류 하나, 라이센스 하나에 사업 전체가 휘청거리는 구조였습니다.
아무리 영어를 공부해 자격증을 따내며 발버둥 쳐도, 타인의 손에 의존해야 하는 행정 서류와 복잡한 보험 청구 시스템의 굴레를 남편과 둘이서 다 벗어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창업 노트 #19
핵심 서류와 행정 관리는 절대로 타인에게 전적으로 맡기지 마라
미국에서는 정부 기관(메디케어 등)의 공식 우편물이나 갱신 요구 서류 하나를 제때 챙기지 못하면, 그동안의 모든 대금 청구가 동결되어 사업 전체가 마비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언어장벽이 있더라도 중요한 행정 우편물은 업주가 직접 크로스체크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언어와 시스템의 장벽은 직접 몸으로 부딪쳐 넘어야 한다
타인의 손에만 의존해서는 사업의 위험 요소를 제어할 수 없습니다. 생소한 의학 용어와 전문 자격증 시험(당뇨신발 Fitter 라이센스)에 직접 도전했듯, 해외 창업에서는 업주 스스로가 시스템을 이해하고 라이센스 등의 자격을 갖추려는 주도적인 노력이 필수적입니다.
서류 청구 기반 사업은 예상치 못한 정산 지연에 대비한 자금 완충대가 필요하다
행정적 오류나 제도 변경으로 1년 가까이 대금이 묶이는 돌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수입이 한동안 끊기더라도 매장 임대료와 기본 유지비를 버텨낼 수 있는 비상 자금 계획이 세워져 있지 않으면 결국 적자의 늪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다음 이야기
남편의 의료기 사업은 끝내 제 마음을 편하게 해주지 못했습니다.
매장 문을 열 때마다 먼지가 내려앉은 채 팔리지 않는 의료기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워졌습니다.
반면, 한국에서 하던 바젤워치 사업은 너무나 잘되었습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우리 가족은 일 년에 두 번씩 메리어트 타임쉐어 콘도로 여행을 다닐 수 있었지만, 막상 여행지에 가서도 제 손에서 노트북은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하와이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도 제가 가장 먼저 펼쳐 든 것은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일과 이메일이었습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빛바랜 의료기 매장에서 느꼈던 숨 막힘, 그리고 하와이 해변과 뉴욕 호텔에서도 손에서 놓지 못했던 노트북과 착신 전화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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