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백화점만 보면 토할 것 같았습니다
OUR K STORY #11
지난이야기에서는 미국과 한국을 연결하는 해외구매대행 쇼핑몰, '미제다'를 만들고 첫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미국에서 다시 시작한 저희 부부에게는 희망이 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희망은 곧 끝없는 발품과 체력 싸움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백화점이 제 일터가 되었습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백화점은 저에게 꿈같은 곳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잡지나 TV에서만 보던 명품 브랜드들이 제 눈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직접 만져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했고, 매장마다 진열된 화려한 상품들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곤 했습니다.
무엇보다 백화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퍼지던 은은한 향수 냄새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 향기가 얼마나 고급스럽고 황홀하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그때의 저에게 미국 백화점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였고, 설렘이었습니다.
하지만 미제다를 시작한 뒤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백화점은 더 이상 구경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출근하는 일터가 되었습니다.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면 곧바로 백화점과 아울렛으로 향했습니다.
아베크롬비, 홀리스터, 갭, 게스, 코치….
하루에도 몇 군데씩 돌아다니는 일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설레던 백화점이 어느 순간부터는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습니다.
사업을 그만둔 뒤에도 한동안은 백화점에 가는 것 자체가 싫을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그곳에는 제 땀과 긴장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영어는 단어보다 발음이 더 어려웠습니다
하루는 손님이 보라색 티셔츠를 주문하셨습니다.
저는 매장 직원에게 다가가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Violet 티셔츠를 찾고 있어요.”
제 생각에는 분명히 말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직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저는 다시 한번 크게 말했습니다.
“Violet.”
그래도 직원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왜 못 알아듣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국식으로 ‘바이올렛’이라고 말하고 있었고, 이곳 사람들에게 통하려면 ‘비올렛’에 가깝게 굴려 발음해야 한다는 것을요.
영어를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국에서 대학까지 졸업했고, 학교에 다닐 때는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려고 머리를 싸매며 공부했습니다.
시험을 위해 문법을 외우고, 단어장을 붙들고, 그렇게 힘들게 배웠던 영어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미국 매장 한가운데서 티셔츠 색깔 하나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서 있으니, 허탈함과 함께 한국 영어 교육에 대한 깊은 환멸이 밀려왔습니다.
‘내가 그동안 그렇게 힘들게 배웠던 영어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단어를 외우고 문법 문제를 맞히는 영어는, 실제 미국 생활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날 저는 한국에서 배운 영어와 미국 현지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영어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재고는 늘 저보다 빨랐습니다
더 힘들었던 것은 재고였습니다.
매장에 전화해서 확인하면 분명 있다고 했는데, 막상 도착하면 방금 팔렸다고 하는 일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면 직원에게 다른 지점 재고를 조회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어느 매장에 하나 남아 있어요."
그 말을 들으면 또 차를 몰고 달렸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운전해 겨우 물건 하나를 구해 오는 날도 있었고, 결국 찾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오는 날도 많았습니다.
주문이 들어온다고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었습니다.
배송비 계산도 쉽지 않았습니다
겨울이 되자 어그부츠 주문이 정말 많이 들어왔습니다.
주문이 밀릴수록 저는 여러 켤레를 한꺼번에 모아 한국으로 보내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큰 실수를 했습니다.
무게에 따른 국제배송비를 제대로 계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배송비를 충분히 받을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제가 부담해야 하는 금액이 훨씬 많았습니다.
한 번의 계산 실수로 적지 않은 손해를 보았습니다.
그때는 주문만 많이 받으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해외구매대행은 상품을 잘 사는 것만큼이나 배송비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도 중요한 사업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비행기를 놓치면 모든 것이 늦어졌습니다.
미국에서 물건을 찾는 일만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건을 모두 모으면 집에서 다시 주문별로 확인하고 포장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박스들을 LA에 있는 국제배송 물류업체 GPS 물류회사까지 직접 가져다주어야 했습니다.
마감시간을 놓치면 그날 비행기에 물건을 실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 도착도 하루 늦어지고, 고객에게 가는 배송도 늦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촉박한 날이면 정말 전쟁이 따로 없었습니다.
남편은 박스를 차에 싣고 프리웨이를 달렸고, 저는 옆에서 계속 시간을 확인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늦을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
시속 80마일, 90마일로 달려 LA까지 가던 그 길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그때는 하루하루가 그렇게 쫓기듯 지나갔습니다.
미국에서는 제가 물건을 찾고, 남편은 마감시간에 맞춰 물류회사로 달리고, 한국에서는 오빠가 다시 박스를 풀어 고객별로 발송했습니다.
한국에서도 모두가 함께 뛰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제가 물건을 찾고 보내면 한국에서는 형부가 운영하던 종로의료기로 물건이 도착했습니다.
오빠와 직원은 그 많은 박스를 하나하나 풀어 주문서와 대조하며 검수한 뒤, 고객별로 다시 포장해 발송했습니다.
반품이 들어오면 그 물건을 다시 확인하고, 다른 주문에 맞춰 재포장하는 일도 모두 한국에서 처리해야 했습니다.
주문이 점점 늘어나자 한국에서도 일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많아졌습니다.
미국에서 물건이 도착할 때마다 수십 개의 상품을 분류하고 포장하다 보니 가끔은 다른 고객의 물건이 잘못 들어가거나 배송지가 바뀌는 실수도 생겼습니다.
그럴 때마다 오빠는 반품을 다시 받고, 고객에게 사과하고, 물건을 다시 포장해 보내야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제가 물건을 찾아 뛰어다니고, 한국에서는 오빠와 직원들이 배송과 반품을 처리하며 함께 뛰고 있었습니다.
반품을 받고 다시 배송하는 그 고충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아이들도 저마다 미국에 적응하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아이들도 학교생활을 시작하며 미국에 적응해 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곧바로 일을 시작했고, 학교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다시 데리러 갔습니다.
늘 아이들 곁에 있으려고 노력했지만, 사실 마음은 언제나 주문과 재고, 배송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아이들도 낯선 환경에서 열심히 버티고 있었고, 저 역시 가족을 위해 하루하루 버티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미국이라는 환경에서 살아내기 위해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모두가 힘들었지만, 누구 하나 힘들다고 말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미제다는 그렇게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버텨 낸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이야기
주문은 계속 늘어났지만 제 몸은 하나뿐이었습니다.
매일 새 상품을 등록하고, 품절을 확인하고, 반품을 처리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저는 점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아이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고, 친정엄마까지 미국으로 오시면서 저희 가족의 삶은 또 다른 변화를 맞게 됩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사업과 가족, 어느 하나도 놓을 수 없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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