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민 첫날, 우리는 다시 0에서 시작했습니다
OUR K STORY #8
종로의료기를 정리하고, 상가건물을 마련하고, 이삿짐을 배편으로 보내고,
엄마와 눈물로 이별한 뒤 저희 가족은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한국을 떠났던 2004년 12월 6일 그날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저희는 종로의료기를 일으켰고, 인터넷 쇼핑몰 사업도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땅에 내리는 순간, 그 모든 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저희는 가진 것도, 아는 것도, 영어도 부족한 평범한 이민자 가족일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0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LA 공항에 도착하다
미국에 도착한 뒤, LA 공항에서 다시 입국 심사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에서 이미 영주권 승인을 받고 왔지만, 막상 입국 심사대 앞에 서니 모든 것이 낯설고 조심스러웠습니다. 영어가 잘 들리지 않아 많이 긴장했고, 심사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아듣지 못해 괜히 더 움츠러들었습니다.
LA 공항에 처음 내린 순간, 저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하나는 한국을 떠나왔다는 슬픔이었고, 다른 하나는 낯선 현실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보던 미국은 자유롭고 멋진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처음 마주한 LA 공항은 상상과 많이 달랐습니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무표정한 공항 직원들,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따뜻한 환영을 기대했던 제게 미국은 생각보다 차갑고 낯선 곳이었습니다.
공항에서 임시 영주권과 관련된 서류심사 절차를 받았고, 한 달쯤 지나 집으로 실제 영주권 카드가 도착했습니다. 그제야 ‘정말 우리가 미국에서 살게 되었구나’ 하는 실감이 났습니다.
그때 입국 심사를 기다리며 저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여기는 한국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구나.’
한국에서는 종로에서 사업을 하며 고객을 이해한다고 생각했고, 인터넷 쇼핑몰도 성공적으로 운영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 경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공항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람도 달랐고, 문화도 달랐고, 무엇보다 언어가 달랐습니다.
그때 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미국에서 살아남으려면 영어를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그때는 그저 막막하기만 했지만, 돌이켜보면 그날의 깨달음은 훗날 미국에서 다시 사업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공항 밖에는 남편의 막내동생이 우리 가족을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희 가족의 미국 이민 생활은 낯섦과 두려움, 그리고 다시 배워야 한다는 마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세리토스의 낯선 집
저희는 한국에 있을 때부터 아이들 학교를 생각해 세리토스 하이스쿨 바로 앞, 유명한 세리토스 도서관 근처에 있는 하우스를 미리 구해 두었습니다.
방 4개짜리 2층집이었고, 렌트비는 한 달에 2,300달러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한 선택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민 온 많은 가족들은 보통 방 2개짜리 아파트에서 시작했습니다. 렌트비도 대략 1,200달러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아이들 학군만 생각했습니다.
‘아이들만큼은 좋은 학교에 보내야 한다.’
그 마음 하나로 좋은 학군에 있는 하우스를 선택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파트가 좋은 주거 형태라고 생각했지만, 미국에 와 보니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미국에서는 아파트보다 하우스가 더 중산층의 삶처럼 보였습니다.
그때는 그런 차이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미국, 특히 캘리포니아는 늘 따뜻한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얇은 옷만 챙겨 입고 왔습니다.
그런데 12월의 캘리포니아는 낮에는 따뜻해도 밤에는 생각보다 훨씬 추웠습니다.
집에 도착했는데 집 안이 너무 추웠습니다. 텅 빈 넓은 집은 더 차갑게 느껴졌습니다.
결국 도착하자마자 Sears에 가서 담요와 난로를 사 왔습니다.
그 집은 오래된 미국집이었습니다. 방마다 천장에 불이 없었고, 긴 스탠드를 켜야 방이 밝아졌습니다.
처음에는 그것도 너무 이상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방마다 천장에 등이 있는 것이 당연했는데, 미국집은 그렇지 않은 집이 많았습니다.
마당에는 감나무와 오렌지나무가 있었고, 앞마당에는 잔디가 있었습니다. 잔디에 물도 줘야 했습니다.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그 첫날 밤, 저희 가족은 한 방에 모여 담요를 덮고 오들오들 떨며 잠을 청했습니다.
미국에서의 첫 밤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다음 날부터는 살림을 다시 마련해야 했습니다.
세탁기, 냉장고, 가전제품, 생활용품까지 모든 것을 하나씩 사야 했습니다.
한국에서 배편으로 보낸 이삿짐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집은 넓었지만 비어 있었습니다.
필요한 전자제품만 최소한으로 샀고, 가구 중 일부는 남편 친척들이 가져다주었습니다.
한국에서 올 때 남편은 큰돈을 가져가지 말자고 했습니다. 미국에 처음 가면 한인들에게 사기당하는 사람도 많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1만 달러도 안 되는 돈만 들고 미국에 왔습니다.
하지만 막상 와 보니 돈은 너무 빨리 나갔습니다.
렌트비, 가전제품, 생활용품, 자동차, 보험, 아이들 학교 준비까지.
미국 생활은 시작부터 돈이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사업으로 다시 일어섰다고 생각했지만, 미국에서는 모든 것을 다시 처음부터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민은 단순히 나라를 옮기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삶의 시스템을 처음부터 다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미국에 온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비가 쏟아졌습니다. 길에는 물이 차오르고, 이러다 홍수가 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습니다.
한국에서 생각했던 캘리포니아는 늘 햇빛이 밝고 따뜻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12월의 캘리포니아는 밤이면 춥고, 비까지 오면 더더욱 몸이 움츠러들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캘리포니아는 겨울에 비가 몰아서 오는 곳이었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날이 많고, 겨울이 되면 한꺼번에 비가 쏟아지곤 했습니다.
그 낯선 날씨마저도 제게는 미국 생활을 새로 배워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아이들 학교를 보내다
이민 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아이들 학교를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미국도 한국처럼 집 주소에 따라 학교가 정해졌습니다. 저희가 세리토스에 집을 얻은 이유도 바로 학군 때문이었습니다.
세리토스 하이스쿨은 좋은 학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학군은 마음이 놓였습니다.
하지만 중학교는 구역이 달랐습니다.
아이들은 저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분위기의 미들스쿨에 가게 되었습니다. 멕시칸 학생들이 많은 학교였고, 처음에는 낯설고 걱정도 되었습니다.
아이들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언어도, 친구도, 학교 분위기도,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부모인 저희도 잘 몰랐고, 아이들도 잘 몰랐습니다.
그렇게 저희 가족은 미국 생활을 하나씩 배워 갔습니다.
저도 영어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어덜트스쿨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일상생활을 하려면 영어를 배워야 했고, 아이들 학교 일을 보려면 더더욱 영어가 필요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사업을 하며 직원들과 손님들을 상대하고,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며 바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미국에 오니 다시 학생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은행에 가는 것도 어렵고, 마트에서 물건을 사는 것도 낯설고, 전화 한 통 하는 것도 부담스러웠습니다.
한국에서는 사업가였지만, 미국에서는 영어 한마디에 긴장하는 이민자가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살아가려면, 그리고 다시 사업을 하려면, 언어와 생활을 먼저 배워야 했습니다.
쉬고 싶었지만 렌트비는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저희 부부는 몇 달은 좀 쉬고 싶었습니다.
한국에서 너무 오래, 너무 치열하게 일했기 때문입니다.
종로의료기가 잘될 때는 하루 종일 전화와 주문, 배송과 상담에 매달려 살았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와서는 잠시 숨을 고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오래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한 달 렌트비 2,300달러, 생활비,아이들 교육비용,차량 유지비 등등 돈은 계속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집이 넓어서 좋다고 생각했지만, 한 달만 지나도 렌트비가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계속 돈만 쓰면 안 되겠다.’
‘이제 뭔가 해야 한다.’
그 생각이 점점 커졌습니다.
사업을 하지 않고 쉬는 시간이 처음에는 좋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쉬어 보니 이상했습니다.
늘 무언가를 팔고, 고객을 만나고, 매출을 확인하던 사람이 갑자기 멈춰 서니 마음이 더 불안해졌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저희 부부에게 사업은 단순히 돈을 버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삶을 움직이게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남편은 의료기 사업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미국에서도 의료기 사업을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 종로의료기를 성공시켰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에게 의료기는 가장 익숙한 분야였습니다. 어떤 제품이 필요한지, 손님들이 무엇을 찾는지, 상담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도 의료기 사업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가게 자리를 보고, 한인 상권을 살피고, 미국에서 의료기 사업이 가능한지 고민했습니다.
한국에서 통했던 방식이 미국에서도 통할지 알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미국은 낯선 나라였지만, 사업을 해야 한다는 마음만큼은 분명했습니다.
저는 다시 온라인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종로의료기를 키운 가장 큰 힘은 인터넷이었습니다.
강서구의 작은 매장을 전국에서 찾아오게 만든 것도 온라인 쇼핑몰이었고, 밤사이 주문이 쌓이게 만든 것도 인터넷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와서도 자연스럽게 컴퓨터 앞에 앉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도 인터넷으로 무언가를 팔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미국 물건을 한국에 팔 수 있을까.
어떤 상품이 가능할까.
어떻게 결제를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한국으로 배송할 수 있을까.
하나도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온라인은 작은 가게도 큰 시장으로 연결해 줄 수 있다는 것을요.
한국에서 종로의료기가 그 증거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사이트들을 보고, 어떤 상품이 팔리는지 살펴보고, 한국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제품을 생각했습니다.
아직 뚜렷한 답은 없었지만, 마음속에서는 다시 사업의 불씨가 살아나고 있었습니다.
왜 저는 미국 사람을 상대로 장사하지 않았을까
미국에 와서 가장 먼저 고민한 것은 무엇을 팔 것인가였습니다.
많은 한국분들이 미국에 살면 미국에 있는 한인이나 미국사람을 상대로 장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처음부터 생각이 달랐습니다.
저는 영어가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한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언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그 나라 사람을 상대로 사업해서는 안 된다.’
장사는 단순히 물건을 파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손님의 마음을 읽고, 불만을 해결하고, 신뢰를 쌓아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의 기본은 언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국 사람이 아니라 한국 고객을 선택했습니다.
미국에 살면서 미국 물건을 한국에 판매하는 것이 제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한국 소비자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상품을 찾는지, 한국어로 상담하는 것이 훨씬 자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남편은 미국에서도 의료기 사업을 해보려고 준비했습니다. 한국에서 종로의료기를 성공시킨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과 달랐습니다.
언어와 문화, 사업 방식까지 모두 새로 배워야 하는 시장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언어를 제대로 익히지 못하면 그 나라 사람을 상대로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저는 미국에서 한국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선택이 훗날 미국 물건을 한국에 판매하는 온라인 사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지금은 AI가 번역도 해 주고, 고객 상담도 도와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전보다 언어의 장벽은 훨씬 낮아졌습니다.
하지만 2004년 당시에는 AI도 없었고, 번역기도 지금처럼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시장을 선택하는 것이 성공의 첫걸음이라고 믿었습니다.
다시 0에서 시작하다
미국 이민 첫해는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
집도 낯설고, 학교도 낯설고, 영어도 낯설고, 생활 방식도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낯설었던 것은 저희 자신이었습니다.
한국에서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사업을 키우고, 다시 일어섰던 저희 부부가 미국에서는 다시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헛되지는 않았습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저는 어덜트스쿨에 다니며 영어를 배우고, 남편은 의료기 사업을 알아보고, 저는 온라인 사업을 연구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쉬는 시간이었지만, 사실 그 시간은 다시 창업을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사업은 늘 가게 문을 여는 순간 시작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낯선 시장을 관찰하고,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살피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시 찾는 시간도 사업의 시작이었습니다.
미국에서의 첫 몇 달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다시 온라인 쇼핑몰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이야기
미국에서 다시 인터넷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점점 구체적인 행동으로 바뀌었습니다.
처음 만든 것은 비타민 쇼핑몰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법도, 온라인 시장도, 경쟁 구조도 잘 몰랐던 저에게 첫 시도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은 곧 LOSKOREA라는 미국 사업체와, 나중에 한국에서 만든 미제다로 이어지게 됩니다.
다음 편에서는 미국에서 처음 시작한 온라인 사업, 비타US와 LOSKOREA의 시작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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