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가건물을 산 엄마, 건물주가 되다
OUR K STORY #6
사업이 가장 잘될 때, 우리는 미국을 선택했습니다
지난 이야기에서는 사업이 커질수록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부모로서 많은 후회가 남았던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그무렵, 저희 가족 앞에는 또 하나의 큰 선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미국 영주권이었습니다.
IMF가 다시 꺼낸 미국이라는 꿈
사실 저희 가족은 결혼 후 남편을 따라 미국 영주권을 신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미국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습니다. 낯선 나라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어 결국 포기했었습니다.
그러다 1997년 IMF 외환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아이들에게만큼은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
남편 역시 이제는 한국 시장에만 머무를 게 아니라, 달러를 벌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저희는 미국 영주권을 다시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미국대사관 앞 이민 법률 사무소를 수없이 드나들던 시간
가족초청으로 미국 영주권을 재신청하고 최종 승인을 받기까지의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길고 답답했습니다.
1997년 IMF 직후 한국에서 미국 이민 신청자가 급증한 데다가, 2001년 9·11 테러 사건 이후 미국 정부가 이민 비자 심사와 신원 조회를 엄청나게 강화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2000년대 초반에는 대기 기간이 평소보다 2배 이상 늘어나는 극심한 적체 현상이 있었습니다.
그런 속사정도 모른 채, 저는 왜 이렇게 소식이 없냐며 애꿎은 미국 이민 변호사 능력만 탓하고 원망했습니다. 변호사를 바꿔야 하나 고민하며, 광화문 미국 대사관 앞 이민 법률 사무소들을 들락거리며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곤 했습니다.
미국에 있는 변호사가 준비한 서류를 들고 대사관 앞 법무사 사무실을 누비고, 부족한 서류가 있으면 다시 미국에 요청해 수정하고... 서류 하나가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 눈물겹고 애타는 심정으로 서류 작업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북창동 순두부의 추억
대사관 앞 법률 사무소에 다녀오는 날이면 남편과 꼭 들르던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광화문 미대사관 근처에 있던 북창동 순두부집이었습니다.
따뜻한 순두부 한 그릇을 앞에 두고, 남편과 서로를 다독이며 애타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잘될까?" "승인이 빨리 나면 좋겠다." "도대체 언제까지 여기를 이렇게 드나들어야 할까..."
거의 6년이라는 너무 오랜 세월을 기다리다 보니, 그사이 한국에서는 '종로의료기'가 대박이 나서 굳이 미국에 안 가도 그만인 상황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일이니 빨리 승인되기만을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나중에 미국에 이민 와서 보니, 그 'BCD Tofu House(북창동순두부)' 체인이 미국 LA에서 시작해 엄청난 대형 체인을 갖춘 유명 식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참 신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대사관 골목에서 먹었던 오래된 묵은지로 푹 끓인 김치찌개 맛도 아직 잊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곁들이던 두툼하고 굵은 계란말이도 어찌나 맛있었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집에서 아무리 흉내를 내어 보아도 그 맛이 도저히 나지 않더군요. 미국에 그런 김치찌개 집이 있으면 정말 대박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을 지금도 하곤 합니다.
미국대사관 인터뷰와 영주권이 승인되던 날
그렇게 오랜 세월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미국 대사관에서 인터뷰를 하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날 아침의 떨림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대사관 앞에 길게 줄을 서서 철저한 보안 검색을 거쳐 한 명씩 들어갔습니다. 대기석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던 그 시간은 1분이 1년 같았습니다.
'혹시 거절되면 어떡하지?' '서류에 작은 문제라도 있으면 어떡하지?'
저는 극도로 긴장한 채 초조하게 이름이 불리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제 차례가 되었고, 미국 대사관 직원이 서류를 한 장씩 넘기는 동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들려온 한마디.
"승인되었습니다 (Approved)."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영주권이 나왔다는 기쁨도 잠시, 동시에 거대한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아, 정말 우리가 이제 미국으로 가게 되는구나.'
가장 잘될 때 찾아온 선택
참 아이러니했습니다. 영주권이 최종 승인되었을 때, 저희 '종로의료기'는 창업 이래 가장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산후조리원 트렌드를 빠르게 읽어 시장을 선점했고, 학교 양호실과 보건소 납품, 그리고 전국에서 쏟아지는 인터넷 주문까지 넘쳐났습니다. 매일 양화대교를 건너 출퇴근하며 정말 신나게 돈을 벌어들이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앞으로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실한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기다려온 세월과 아이들의 미래, 그리고 미국이라는 새로운 세계에서의 도전 가능성을 생각하면 영주권을 쉽게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형부에게 종로의료기를 넘기다
마침 그 무렵, 저희 형부께서 저희 사업에 큰 관심을 갖기 시작하셨습니다. 과거 잠실 롯데월드 건설 붐 당시에 지하상가에서 사업으로 돈을 잘 벌고 계셨던 형부는, 온라인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종로의료기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 당시 오프라인 매장만으로는 한계가 있던 시기였고,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 쇼핑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던 때였으며 오프라인 매장 중심에서 누구나 온라인 쇼핑몰로 눈을 돌리던 대전환기 였습니다. 특히 의료기 사업은 마진이 좋고 전문적인 상담 능력이 필요한 분야였기에, 이미 자리를 잡은 저희 쇼핑몰은 매력적인 투자처였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저희는 형부에게 종로의료기를 넘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상가건물의 건물주가 되다
사업을 정리한 자금과 그동안 모은 돈을 합쳐 양천구 목2동에 작은 상가 건물을 구입했습니다.
매매가는 6억 8,000만 원이었고, 은행 대출 1억 5,000만 원을 보태어 마련한 우리 가족의 첫 건물이었습니다. IMF로 모든 것을 잃고 눈물 흘리며 빚더미에 앉아 있던 저희 부부가 마침내 번듯한 '상가 건물주'가 된 순간이었습니다. 그날의 감격은 지금도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건물의 위치는 강서구 보건소에서 육교를 건너면 바로 양천구로 이어지는, 등촌시장 위쪽에 자리한 4층짜리 상가주택이었습니다. 1층에는 카센터와 복덕방(부동산)이 입점해 있었지요.
사실 그때 건물을 사면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아파트를 살까, 상가 건물을 살까 고민하던 갈림길이었습니다. 당시 언니와 형부는 잠실 아파트를 가지고 계셨고, 그 아파트들은 이미 가격이 많이 올라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제 눈에는 낡아 빠진 잠실 아파트보다 매달 월세가 나오는 작은 상가 건물이 훨씬 좋아 보였습니다.
'성냥갑 같은 아파트를 왜 저렇게 비싸게 살까? 차라리 내 땅, 내 건물이 낫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것은 제 부동산 안목의 한계였습니다.
그 시절의 잠실은 대세 상승장의 시작이었고, 이후 재건축과 주변 개발이 이어지며 완전히 다른 동네가 되었습니다.
그때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부동산은 지금 눈에 보이는 낡은 외관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그 지역의 인프라와 지도가 어떻게 바뀔지 '미래 개발 계획'을 읽는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저희가 매입한 양천구 상가도 참 좋은 위치였지만, 잠실이 가진 거대한 개발 호재와 파급력에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그 미래 가치의 차이를 미처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가 건물은 저희 부부에게 평생 잊지 못할 큰 의미가 있습니다. 빚더미에서 시작해 당당히 다시 일어섰다는 인생의 증거였고, 낯선 미국으로 떠나기 전 한국에 남겨 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건물을 마련해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 마음은 내내 무겁기만 했습니다. 이제 정말 정든 한국을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피땀 흘려 일군 성공적인 사업, 사랑하는 가족과 특히 홀로 되신 친정엄마, 그리고 늘 함께 기도해 주던 교회 식구들... 익숙하고 소중한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우리는 마침내 미국이라는 거대하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이야기
출국 전날 밤, 마주 앉아 짐을 싸다가 결국 엄마와 붙잡고 펑펑 울어버렸습니다. 배편으로 먼저 떠나보낸 이삿짐, 그리고 커다란 이민 가방 몇 개에 단출하게 담긴 우리 가족의 삶.
12월의 겨울, 비행기에서 내려 영어 한마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무섭고 낯설기만 했던 LA 공항의 공기. 얼어붙을 만큼 추웠던 미국에서의 첫 번째 겨울밤, 세리토스(Cerritos)의 낯선 집에서 시작된 본격적인 이민 생활 이야기.
다음 편에서는 ‘미국 이민 첫날, 우리는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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