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물건이라면 다 팔고 싶었습니다, ‘미제다’의 탄생

OUR K STORY #10

지난 이야기에서는

미국 현지 한인과 미국인을 대상으로 비타민 쇼핑몰을 운영했다가 실패를 겪은 뒤,

그 뼈저린 경험을 통해 새로운 길을 찾게 된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미국 시장을 포기하고 한국 시장으로 눈을 돌려,
해외 직구 사업의 뼈대를 하나씩 구상하기 시작했던 순간이었습니다.

미제다와 로스코리아, 이름에 담은 저희의 꿈

사업의 시작은 언제나 ‘이름’이었습니다.

저는 이미 한국에서 ‘종로의료기’라는 이름으로 키워드 효과를 크게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이름 하나가 사업의 성패를 가를 만큼
얼마나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는지를요.

그래서 이번에도 쉽게 정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의 좋은 물건을 한국에 파는 곳.

그 의미가 직관적으로 전달되면서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한 번에 꽂히는 이름이어야 했습니다.

듣자마자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어야 했습니다.

‘미국 물건을 파는 곳.’

‘미제 물건을 다 모아 놓은 곳.’

그렇게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제가 직접 지은 이름이 바로 미제다였습니다.

한국 쇼핑몰 이름이 정해지자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미국에서 사용할 회사 이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한국에서 들어온 돈을 미국에서 받고, 미국 물건을 사입해 한국으로 보내기 위한 회사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쪽에는 더 큰 생각도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한국 물건도 미국에 팔 수 있지 않을까?’

미국 물건은 한국으로, 한국 물건은 미국으로.

로스앤젤레스와 한국을 오가는 다리 같은 회사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쪽 이름은 로스코리아(LOSKOREA)​라고 지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LA)의 ‘로스’와
대한민국의 ‘코리아’를 합친 이름이었습니다.

이름만 보면 그럴듯했습니다.

미제다와 로스코리아.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사업체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거창한 회사라기보다, 저희 부부가 살아남기 위해 만든 작은 시스템이었습니다.


딸과 함께 다시 한국으로

비타US 실패 후 약 1년쯤 지나 저는 딸아이와 함께 한국으로 나갔습니다.

한국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마음에 걸린 사람은 엄마였습니다.

엄마는 그때 언니네 집에서 지내고 계셨고, 가끔 오빠네 집에도 다녀오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치매는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져 계셨고, 어쩐지 마음이 짠했습니다.

엄마는 우리 딸을 보며 참 좋아하셨습니다.

손주들 중에서도 우리 딸을 유난히 예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너희랑 있을 때가 더 좋았다”고 말씀하실 때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살아남겠다고 발버둥 치고 있었지만, 한국에는 여전히 제 마음 한쪽을 붙잡고 있는 엄마가 계셨습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저와 딸은 저희 상가주택 옥탑방에서 지냈습니다.

마침 옥탑방이 비어 있었고,
엄마도 모셔와 함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작고 소박한 공간이었지만,
저에게는 참 따뜻하고 편안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옥탑방에서
‘미제다’ 쇼핑몰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종로의료기의 은인, 다시 만나다

저는 곧바로 종로의료기 홈페이지를 만들어 주셨던 분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미국 물건을 한국에 파는 쇼핑몰을 만들고 싶어요.”

이번에는 비타민만 파는 사이트가 아니었습니다.

옷도 팔고, 신발도 팔고, 가방도 팔고, 시계도 팔고, 미국에서 구할 수 있는 좋은 물건이라면 다 팔고 싶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욕심이 많았습니다.

남편과 저 둘이서 운영할 생각이었는데, 처음부터 종합몰을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몰랐습니다.

한국에서 사업을 해봤고, 쇼핑몰도 성공해 봤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미국에 있으니까 미국 물건은 내가 누구보다 잘 구할 수 있다.’

그 생각 하나로 밀어붙였습니다.

여러 번 만나 의견을 나누며 디자인 콘셉트를 조율한 끝에

미제다 홈페이지가 완성되었습니다

미국에서 만들었던 사이트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만든 비타US는 가격은 비쌌지만 디자인도 오래돼 보였고 기능도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만든 미제다는 달랐습니다.

훨씬 세련됐고, 훨씬 빠르고, 훨씬 쇼핑몰다웠습니다.

그때 저는 또 한 번 느꼈습니다.

‘인터넷 쇼핑몰은 한국이 훨씬 빠르게 성장하고 있구나.’

미국이 모든 면에서 앞서 있을 줄 알았는데, 적어도 온라인 쇼핑몰 디자인과 기능만큼은 한국이 훨씬 세련되고 빨랐습니다.

결제도 한국 PG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고객이 한국 돈으로 결제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미제다 안에는 하나둘 카테고리가 채워졌습니다.

패션 카테고리에는 홀리스터, 아베크롬비, 아메리칸이글, 갭, 게스 같은 브랜드를 넣고 싶었습니다.

액세서리에는 알마니, 게스, DKNY 같은 패션시계를 올리고 싶었습니다.

신발에는 어그부츠를, 가방에는 코치백과 게스백, 더 나아가 명품 가방까지 꿈꿨습니다.

미국 가정용품도 넣고 싶었고, 미국에서만 볼 수 있는 생활용품도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미국 물건이라면 다 팔고 싶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처음부터 너무 크게 벌였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저는 작게 시작하는 법을 잘 몰랐습니다.

멋있게 만들고 싶었고, 남들이 보기에도 큰 쇼핑몰처럼 보이고 싶었습니다. 

쇼핑몰을 만들면서 한편으로 한국 물류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제가 물건을 찾고, 사고, 박스에 담아 한국으로 보냈고

그러면 한국에서는 그 물건을 고객별로 다시 포장해 발송하였습니다.

그 일을 도와준 곳이 바로 형부가 인수한 종로의료기였습니다.

마침 그때 오빠가 형부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고, 제가 미국에서 물건을 한 박스에 모아 보내면 한국에서는 오빠와 직원이 그 물건을 하나씩 확인해 손님들에게 개별 발송해 주었습니다.

반품이 들어오면 그것도 한국에서 먼저 받아 정리해 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제다는 저 혼자 만든 쇼핑몰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제가 물건을 사입하고, 한국에서는 가족들이 고객에게 보내 주었습니다.

로스코리아, 미제다, 그리고 형부의 종로의료기가 함께 움직였던 작은 가족 물류망이었습니다.

돈도 많지 않았고, 직원도 많지 않았지만 그때 저희에게는 그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남편의 새로운 도전

그 무렵 남편도 미국에서 다시 의료기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성공했던 종로의료기의 경험을 살려, 가든그로브에 종로메디칼서플라이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시장은 한국과 달랐습니다.

한국에서 통했던 이름과 방식이 미국에서는 그대로 통하지 않았고, 의료기 사업 시스템도 많이 달랐습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미국 시장에서 길을 찾고 있었고, 저는 미제다를 통해 한국과 미국을 잇는 온라인 쇼핑몰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 저희 부부는 각자의 자리에서 다시 한번 삶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미국으로, 진짜 시작

저는 한국에서 엄마도 만나고, 언니와 오빠도 만나고, 쇼핑몰 제작까지 마친 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비타US의 실패로 한 번 무너졌던 마음이 미제다를 보며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되겠다.’

‘이제는 한국 사람들에게 미국 물건을 팔 수 있겠다.’

그렇게 미제다는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한국에서 주문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주문이 올 때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미국에서 다시 시작한 저희 부부에게는 그 주문 하나하나가 희망이었습니다.

"이제 정말 다시 일어설 수 있겠다."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 뒤에는 아무도 보지 못한 또 다른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종합몰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카테고리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손이 많이 간다는 뜻이었고, 상품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문제가 많이 생긴다는 뜻이었습니다.

주문은 들어오는데 물건은 없고, 온라인에는 품절이고, 매장마다 재고가 달랐던 그 시절.

미제다의 진짜 이야기는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다음 이야기

세련된 모습으로 문을 연 미제다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베크롬비 티셔츠 한 장, 코치 가방 하나를 구하기 위해 미국 곳곳의 백화점과 아울렛을 하루 종일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자마자 매장으로 달려가고, 픽업 시간 전에 맞춰 돌아오는 날들이 반복되었습니다.

원하는 물건을 찾지 못해 허탕을 치는 날도 많았습니다.

주문이 늘어날수록 기쁨보다 책임감이 더 커졌습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화려해 보였던 미제다 뒤에서, 직접 발로 뛰며 물건을 찾아야 했던 미국 현지 바잉(Buying)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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