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해외 구매대행의 시작, 나의 미제 소싱 도전기

OUR K STORY #9

눈물로 삼킨 첫 실패, 그리고 새로운 길을 찾기 시작하다

지난 이야기에서는 낭만 가득할 줄 알았던 미국 이민 생활이 첫날 밤부터 얼마나 냉혹한 현실로 다가왔는지 들려드렸습니다.

매달 칼같이 빠져나가는 2,300달러의 렌트비 앞에서 저희 부부는 쉬고 싶다는 사치를 접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각자의 강점을 무기로 삼아 미국에서 새로운 사업의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철저히 고립된 미국의 밤, 거지 같아진 생활

미국에 살면서 가장 먼저 깜짝 놀란 것은 한국과 너무나도 다른 삶의 패턴이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저녁만 되면 썰물처럼 다들 집으로 돌아갔고, 아침이면 아주 일찍 일터로 향했습니다. 주택가 근처에 화려한 상가나 술집이 즐비한 한국과 달리, 이곳은 철저하게 집 - 직장 - 가정 - 교회 뿐인 적막한 세상이었습니다.

해가 지면 사방이 무서우리치만큼 깜깜해졌습니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미국의 밤은 저희 가족에게 지독한 외로움을 선물했습니다. 밤낮없이 활기차던 한국의 밤거리가 사무치게 그리웠습니다.

현실적인 생활은 말 그대로 '거지같이' 변해갔습니다.

한국에서는 번듯한 자산가로 맛있는 것도 마음껏 사 먹으며 살았는데, 미국에서는 당장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이 너무 컸습니다. 외식 한 번 마음 편히 하기가 무서운 처지가 된 것입니다.

한국에서 나오던 매달 얼마 안 되는 월세를 쥐어짜듯 받아 렌트비를 메꿨지만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결국 한국에 있는 집을 담보로 추가 대출까지 받아 가며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했습니다.

돈은 메말라가고, 밤은 너무 어두웠고, 이민자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한국으로 데려다줘!" 딸아이의 외로운 오열

이 지독한 고립감 속에서 가장 먼저 상처를 입은 건 사춘기 딸아이였습니다.

미국은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엄마가 차로 태워다 주지 않으면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친구들과 매일 밖에서 어울리며 자유롭게 놀던 아이였는데, 미국에 오니 말은 안 통하지, 갈 곳은 없지, 완전히 방구석에 갇힌 신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이는 답답함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어느 날 제 앞에서 울부짖었습니다.

"엄마, 나 한국으로 도로 데려다줘! 제발 가고 싶어!"

소리를 지르며 오열하는 딸을 보며 엄마로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한마디에는 친구를 잃은 외로움, 말이 통하지 않는 학교생활의 답답함, 그리고 엄마를 빼앗긴 서운함이 모두 담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당장 먹고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미친 사람처럼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었습니다. 집에 같이 있기는 했지만, 아이 얼굴 한 번 제대로 쳐다보며 따뜻한 대화 한 마디 나눠주지 못했습니다.

돈 버는 일에만 영혼을 팔고 있었기에, 딸아이가 얼마나 외롭고 문드러져 가는지 돌볼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참 가슴 아픈 시간이었습니다.

그때는 먹고사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남편과 저는 하루빨리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도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해주려고 애썼습니다.

생활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영어만큼은 빨리 익혀야 한다는 생각에 집으로 영어 과외 선생님을 불러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딸아이는 피아노를 좋아해 개인 레슨도 받게 했습니다.

그때의 저는 그것이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영어 과외도, 피아노 레슨도 아니었습니다.

엄마, 아빠와 함께 웃고 이야기하며 미국에서의 낯선생활과 고충을 이겨내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아들은 겉으로는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축구에 푹 빠져 친구들과 어울렸고, 열심히 운동한 끝에 고등학교 축구부 주장까지 맡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들은 잘 적응했구나.' 하고 안심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아들도 대화할 상대가 많지 않았던 낯선 미국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외로움을 견디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 힘들었던 시간은 우리 가족의 신앙을 더욱 깊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딸은 누구보다 외롭고 힘들었던 그 시간을 지나며 하나님을 스스로 찾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아이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부모인 저는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남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부모가 채워주지 못했던 빈자리를 당신의 방법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비타US의 탄생, 그리고 일주일 만의 고소경보

가족들의 외로움을 뒤로한 채, 저는 밤낮으로 인터넷을 뒤졌습니다. 시장 조사를 하던 중, 미국 비타민 제품들이 인터넷에서 아주 잘 팔릴 것 같다는 직감이 왔습니다.

눈에 불을 켜고 당시 잘나가던 뉴욕의 한 비타민 사이트를 철저하게 벤치마킹하기 시작했습니다. 컴퓨터 언어도, 현지 사정도 잘 모르던 시절이라 LA에 가서 무작정 웹사이트 개발 업자를 찾아가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드디어 '비타US'라는 미국 비타민 쇼핑몰 사이트를 구축해 냈습니다. '이제 드디어 달러를 벌어보는구나!'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법은 생각보다 훨씬 냉혹하고 무서웠습니다.

사이트를 오픈한 지 딱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난데없이 뉴욕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말은 차갑고 단호했습니다.

“당장 사이트를 내리지 않으면 고소하겠습니다.”

미국 법도 모르고, 저작권이나 온라인 시장의 경쟁 구조도 전혀 모른 채 무작정 잘되는 사이트를 카피하다시피 만들었던 게 화근이었습니다. 그때의 당황함과 황당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결국 오픈한 지 일주일 만에 사이트를 눈물을 머금고 내려야 했습니다. 뼈를 깎는 노력과 정착 자금을 쏟아부어 만든 첫 작품이 단 일주일 만에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낡은 미국 집구석에서 멍하니 주저앉아 눈물만 흘렸습니다.


"성공하려면 한국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첫 사업의 쓰라린 실패 끝에 뼈저린 결론을 내렸습니다.

‘언어가 완벽하게 통하지 않는 한, 이 미국 땅 안에서 미국인들을 상대로 성공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내가 가장 잘 아는 시장, 말이 통하는 사람들에게 팔아야 했습니다. 생각을 뒤집었습니다. 미국 물건을 미국에 파는 게 아니라, 미국의 좋은 물건들을 한국 시장에 파는 '해외 직구 사업'을 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당시 한국에서 해외 직구 쇼핑몰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던 '위즈위드(Wizwid)' 사이트를 밤새도록 벤치마킹했습니다. 실패에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저는 곧바로 실행에 옮겨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미국 사업자가 아닌, 한국에서 정식으로 한국 사업자 등록을 내고 ‘미제다(MIJEDA)’라는 브랜드를 만들었습니다. 홈페이지를 새로 구축하고 미국의 좋은 상품들을 소싱해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신기하게도 한국에서 주문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지옥 같은 고생은 그때부터였습니다.

한국으로 보내는 택배 물류는 배송을 대행해 주는 전문 업체(GPS)를 연결해 어떻게든 해결했습니다. 진짜 문제는 ‘상품 구하기’와 ‘사이트 관리’였습니다.

패션 의류 카테고리를 취급하다 보니, 유행과 시즌에 따라 상품이 매번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었습니다. 한국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온라인 주문을 넣었는데 온라인은 오프라인과 달리 재고가 더 빨리 소진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옷을 구하기 위해 미국 현지 아울렛과 매장들을 거의 매일같이 제 발로 직접 뛰며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게다가 옷은 종류와 유행이 계속 바뀌었습니다.

오늘 올린 상품이 며칠 뒤에는 품절되기도 했고, 새로운 상품이 나오면 사진과 설명을 다시 정리해 올려야 했습니다.

매일 밤 컴퓨터 앞에 앉아 상품을 하나하나 등록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미국 집 주소를 기반으로 ‘로스코리아(LOSKOREA)’라는 법인을 다시 세웠습니다. 한국의 ‘미제다’를 통해 주문을 받고, 미국의 ‘로스코리아’를 통해 대금을 정산받은 뒤, 물건을 한국으로 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며 미국에서 상품을 구하고, 한국 고객에게 판매하고, 다시 미국으로 송금하는 직구 사업의 기본 구조가 조금씩 만들어져 갔습니다.

이민 초기의 어려움과 첫 고소 사건은 당시에는 너무 힘든 일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저를 미국 현지에서 사업을 배워 가는 사람으로 단단하게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다음 이야기 예고

한국의 ‘미제다’와 미국의 ‘로스코리아’ 시스템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자, 감사하게도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계신 고객들은 제가 미국 현지에서 직접 보고 고른 상품들에 관심을 보여 주셨고, 그 반응은 저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업이 커질수록 해야 할 일도 함께 늘어났습니다. 미국에서 물건을 구하고, 주문을 확인하고, 포장하고, 한국으로 보내는 일까지 모든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미제다’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던 시간과, 그 매출 뒤에서 저희 부부가 직접 부딪히며 감당해야 했던 미국 이민 사업의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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